아무렇지 않게 열었던 옷장에서, 낯선 공백을 마주했어요.
우리 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부터 한복도 입어보기 시작했죠.
전통 한복의 ‘풀착장’이 아닌,
세련된 믹스매치(Mix & Match) 방식으로요.
전통과 현재를 나만의 방식으로 이어보았습니다.
그 조용한 시작은, 어느새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답니다.
하루는 옷장을 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우리의 전통 의복인 한복 대신 서양 의복을 일상에서 입기 시작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한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티셔츠와 청바지 위에 누비 두루마기를 걸치거나, 짧은 한복 허리치마에 심플한 티셔츠를 매치해 보았습니다. 또, 어깨끈이 달린 전통 한복 치마를 드레스처럼 입고 그 위에 가디건을 걸치기도 했죠. 이렇게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본 것이었습니다.
"어머, 너 옷 너무 예쁘다. 이 한복 어디서 샀어?"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 친구들이 따라와 묻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이 작은 변화가 제 인생에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영화로 이어진 한복 이야기
그럼에도 한복의 역사와 전통이 점점 단절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어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의 세대를 엮어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적은 예산임을 공표하고 발로 뛰며 함께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뜻이 맞는 전문가 30명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촬영 장비 대여, 스텝 비용, 공간 대여료, 배우 개런티 등 촬영이 길어질수록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하루 만에 촬영을 마치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철저히 콘티를 짜고 준비한 덕분에 새벽 4시에 시작해 밤 11시까지, 꼬박 하루 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단편영화 <시절>이 만들어졌습니다.
한복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은 옷고름입니다. 그 비대칭의 아름다움과 옷고름을 맬 때 느껴지는 고요함이 참 좋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건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입니다. 언뜻 언뜻 속감이 보이면서 겉감과 안감이 교차로 보여지는데요. 한복은 안감에도 문양이 있는 걸 쓰기도 하고 참으로 아름답더라고요. 겉감과 안감의 색과 재질, 문양이 서로 어우러지는 조화로움, 상상만해도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영화에서 이 두 요소를 가장 임팩트 있게 담고 싶다고 감독님과 촬영 감독님께 거듭 강조해 말씀드렸습니다. 샘플이 될만한 영상도 함께 보면서 어떻게 촬영할지 논의하였습니다. 영화 촬영 때는 옷고름 매듭 짓는 행위에 한정짓기 보다 한복을 입으면 느낄 수 있는 아련한 감정들을 두루 담고자 모두가 애썼습니다.
그 시절, 할머니를 만나다
이 영화는 할머니에 대한 애도를 담고 있습니다. 촬영 소품으로는 생전에 저를 끔찍이 아껴주셨던 외할머니의 옷과 마실 다니실 때 저를 업고 밤 이슬에 감기 걸리지 말라고 포대기 위에 덮어 주신 뜨개 담요와 할머니의 옷들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뜨개 담요 사이로 바깥 풍경이 어른거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이 할머니 등에 업혀 동네 마실을 다니던 순간이었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에서 할머니와의 추억이 서린 소품들을 보면서 문득 문득 눈물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 영어 자막도 넣어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참 뿌듯했습니다. 크레딧의 가장 첫 줄에 기획자로 제 이름이 올라갔을 때,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일은 처음이었고, 예상 외로 상업 영화 분야에서 일하시는 많은 전문가 분들이 조건 없이 도움을 주셨기에, 제 이름을 빼달라고 정중히 여러 번 부탁드렸습니다. 왠지 거저 받은 훈장 같아서였지요. 그렇다고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했답니다. 비록 이름이 남지 않았어도, 이 경험은 제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왜 저는 이렇게 한복을 사랑하는 걸까요? 아련한 전생의 기억이 얽혀 있는 걸까요? 언젠가 꿈 전문가이자 신화학자인 고혜경 선생님께서 "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역할을 상징한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저의 본성이 진짜 저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 마침내, 그건 '의식의 진화'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의식의 진화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는데, 저의 영혼은 참으로 어렵지만 마땅한 걸 원하고 있네요.
오늘, 그 시절, 순수한 열정으로 작업했던 단편영화 <시절>이 문득 떠올라 그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 이렇게 글을 남겨봅니다.
단편영화 <시절> 포스터
한옥 툇마루에 앉아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세 세대의 여인들, 할머니, 엄마, 그리고 딸의 따뜻한 순간을 담은 포스터입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한옥에서,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며 고요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이 사진은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세대 간의 연결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배우가 두 명인 이유는 한 명이 할머니의 소녀 시절을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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